posted by 어반자카파 2026. 7. 8. 19:26

주말 밤에 불 끄고 태블릿만 켜둔 채로 덴마 1화를 다시 열었다. 우주 택배회사 실버퀵의 배달부 하나가 열두 살짜리 아이 몸에 갇혀 어리둥절해하는 장면. 처음 봤을 때는 그냥 특이한 SF구나 싶어서 넘겼는데, 이번엔 그 아이의 눈빛에서 한참을 멈췄다. 자기가 누구였는지도 모른 채 배달 일부터 시작하는 남자. 그 막막한 표정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덴마는 양영순 작가가 네이버웹툰에서 2010년부터 2019년 12월 29일까지 약 10년을 연재한 작품이다. 프롤로그만 585화, 누적 조회수는 26억 뷰를 넘겼다. 숫자만 보면 그냥 장수 웹툰 같은데, 실제로 정주행을 해보면 이게 왜 웹툰계 스페이스 오페라 소리를 듣는지 알게 된다. 나는 완결 나고 한참 뒤에야 몰아봤는데, 다 보고 나서 며칠은 머릿속에서 이 세계가 떠나질 않았다.

내가 이걸 몰아본 건 지난달이었다. 하루에 30화에서 40화씩, 대략 5일에 걸쳐 끝냈다. 585화면 웬만한 소설 여러 권 분량인데, 신기하게도 중간에 손을 놓기가 어려웠다. 퇴근하고 저녁 먹고 나서 한 편만 봐야지 했다가 새벽 2시까지 붙잡고 있던 날이 3일은 됐다. 나는 원래 이렇게까지 몰입하는 편이 아닌데, 이 작품은 좀 달랐다.

열두 살 몸에 갇힌 배달부, 그 도입부가 던지는 미끼

덴마의 세계에는 퀑이라는 초능력자들이 있다. 주인공 덴마는 질량 등가 치환 능력을 쓰는 퀑인데, 뇌전단 스캐닝이라는 걸 당하고 나서 원래 몸이 아닌 어린아이의 몸에 들어가 버린다. 자기가 왜 이 몸에 있는지, 예전의 자기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이 설정이 참 얄미울 정도로 잘 짜여 있다. 독자인 나도 덴마랑 똑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하니까, 미스터리를 같이 푸는 기분이 든다.

솔직히 초반 20화 정도는 헷갈렸다. 퀑이 뭐고 실버퀵이 뭔지, 용어가 훅훅 던져지는데 친절한 설명이 없다. 나는 화면을 위로 스크롤해서 앞 장면을 다시 확인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몇 화 넘기다 보니 알겠더라. 이건 설정집을 외우라고 만든 만화가 아니었다. 세계관은 그냥 배경이고, 작가가 진짜 보여주고 싶은 건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실버퀵은 이 우주에서 택배를 나르는 회사다. 배달부들은 목적지 좌표를 몸에 새기고 순간이동으로 물건을 옮긴다. 말이 택배지, 사실상 목숨 걸고 뛰는 위험한 일이다. 덴마는 그 밑바닥 배달부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이 설정이 좋았다. 초능력자가 세상을 구하러 다니는 게 아니라,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냥 먹고살려고 배달을 뛴다는 것. 그 현실감이 오히려 세계를 진짜처럼 느끼게 했다.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삶이 겹쳐지는 구조

덴마가 특이한 건 옴니버스 형식이라는 점이다. 덴마 한 사람만 쭉 따라가는 게 아니라, 이 우주에 사는 여러 캐릭터가 돌아가며 자기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엔 이게 산만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웬 사제 이야기, 갑자기 웬 과학자 이야기. 그러다 어느 순간 이 조각들이 하나로 꿰어지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는 다음 화를 안 보고는 못 배긴다.

식스틴이라는 에피소드는 태모신교 사제 이델의 사랑 이야기다. 피기어는 가장이라는 무게를 묵묵히 지고 가는 아버지 이야기고. 괴팍한 과학자 고드 박사가 엔젤 프로젝트를 붙들고 씨름하는 대목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이라는 게 뭔지 계속 묻게 만든다. 콴의 냉장고에 나오는 지로는 회생 불가능해 보이던 인물인데, 바닥에서 다시 일어서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조각들이 다 다른 사람 이야기 같지만, 결국 삶이라는 한 주제 아래 모인다.

나는 이 옴니버스 중에서 식스틴을 제일 여러 번 다시 봤다. 3번은 돌려본 것 같다. 사제 이델의 감정선이 어찌나 촘촘하게 쌓이는지, 마지막 장면에서는 태블릿을 든 채로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웹툰 한 편 보고 이런 기분이 든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반대로 어떤 옴니버스는 20화 넘게 이어지는데 초반이 좀 늘어져서, 나는 두 번째 정주행 때 그 구간을 빠르게 넘긴 적도 있다. 편차는 분명 있다.

세계관을 이해하려고 애쓰다가, 어느새 등장인물 걱정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 웹툰 분위기 이미지
덴마 특유의 광활한 스페이스 오페라 세계관을 떠올리게 하는 우주 풍경

SF의 껍데기를 쓰고 결국 사람 이야기를 하는 만화

덴마를 보면서 신기했던 건, SF인데 SF 같지 않다는 감각이었다. 우주선이 날고 순간이동이 나오고 초능력 배틀이 벌어지는데, 정작 마음에 걸리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청년 세대의 막막함을 이델과 지로가 대신 말해주고, 대한민국 가장의 어깨를 피기어가 보여주고,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소모하는지를 고드 박사가 겪는다. 2010년대에 이 만화를 봤던 또래들이 왜 그렇게 몰입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원래 세계관 빡센 SF를 별로 안 좋아한다. 용어 외우다 지쳐서 도중에 접은 작품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덴마는 달랐다. 설정을 완벽히 이해 못 해도 캐릭터 감정선은 그냥 따라가진다. 이 지점이 SF가 인간을 얼마나 깊게 파고들 수 있는지 보여준 다른 작품을 정주행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장르는 도구일 뿐이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사람이라는 것.

10년 585화를 몰아보며 느낀 장편의 무게

585화를 몰아보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며칠에 걸쳐 나눠 봤는데, 중반쯤엔 나도 살짝 지쳤다. 옴니버스가 늘어지는 구간도 분명 있었고, 인물이 너무 많아져서 누가 누군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이건 솔직히 인정한다. 완벽한 만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방대함이 결국 이 작품의 힘이기도 했다. 10년을 연재하면서 초반에 흩뿌려 둔 떡밥들이 후반부에 착착 회수될 때, 그 카타르시스는 단편으로는 절대 못 낸다. 장편 스토리텔링의 진짜 승부처는 주제의식이라는 말이 있는데, 덴마는 인간 보편의 삶이라는 주제를 10년 내내 놓지 않았다. 긴 호흡으로 완결까지 밀어붙인 장편 명작을 볼 때 느꼈던 뿌듯함이 여기서도 왔다.

밤에 태블릿으로 웹툰을 정주행하는 모습
585화를 며칠에 걸쳐 몰아본 정주행의 밤

다 보고 나서야 보이는 첫 화의 무게

완결까지 다 보고 나서 나는 다시 1화로 돌아갔다. 열두 살 몸에 갇혀 배달을 나가던 그 아이. 처음엔 그냥 시작점이었는데, 전체 서사를 알고 나서 보니 그 장면이 완전히 다르게 읽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일단 살아가야 했던 그 남자의 상황이, 사실 이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의 축소판이었다.

누적 26억 뷰라는 숫자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나는 거대한 세계관 속에서 인간 군상을 그려낸 또 다른 SF를 봤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데, 덴마는 거기에 한국 웹툰 특유의 정서까지 얹었다. 우주를 무대로 하면서도 결국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 보고 나면 화려한 SF 배틀보다, 열두 살 몸에 갇혔던 첫 화의 그 막막한 표정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덴마를 어떤 만화라고 부를까

정주행을 마치고 며칠 지난 지금, 덴마를 뭐라고 정리해야 할지 생각해 본다. SF 대서사시라는 말도 맞고, 스페이스 오페라라는 표현도 맞다. 근데 나한테는 그냥 사람 이야기를 아주 오래, 아주 넓게 펼쳐 놓은 만화였다. 퀑이니 실버퀵이니 하는 장치는 그 이야기를 담기 위한 그릇이었을 뿐이다.

단점도 있다. 초반 20화 남짓은 진입장벽이 높고, 인물이 많아 산만한 구간도 있다. 그래도 나는 5일을 들여 다 보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방대한 세계관에 겁먹지 말고, 캐릭터 감정선만 붙잡고 따라가 보면 어느새 마지막 화다. 완결작이라 끊길 걱정 없이 몰아볼 수 있다는 것도 지금 시점의 장점이다.

혹시 초반에 지루하다고 접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최소 30화까지는 참고 보라고 말하고 싶다. 옴니버스 하나가 온전히 끝나는 지점까지 가면 그때부터 이 만화가 다르게 보인다. 나도 딱 그 구간을 넘기고 나서 밤을 새웠으니까. 아직 안 본 사람이 있다면, 1화의 그 열두 살 아이 표정부터 한번 보라고 하고 싶다. 거기서부터 이 긴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음에 또 이렇게 밤새 몰아볼 완결 웹툰을 찾고 있는데, 덴마만 한 게 쉽게 안 보인다.